1919년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았다. 선조들의 목숨을 건 외침으로 광복을 맞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나라를 찾기 위해 나선 이들에 대한 연구나 예우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김해는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김해지역 약 10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김해 출신 인물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했음에도 그들의 행적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지난 13일 김해에선 처음으로 김해 3·1독립운동에 대한 학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해 3·1운동 기념사업회 관계자, 김해시와 의회, 시민 등이 참석했다. 이날 학술회는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를 중심으로 연구자 4명이 발제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 지난 13일 김해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김해3·1독립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에서 기념사업회 김광호 회장이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사진제공=김해시

 

배동석, 민족대표 밀사 역할
마산·함안 등 만세 시위 기폭제

20세 구명순, 최초 시위 주도
읍내 시작으로 김해 10여 차례

배치문, 임시정부·의열단 활동
광복 3년 앞두고 목포서 옥사

진영, 청년 중심 자발적 운동
시위 기록한 '김승태歌' 재조명




■배동석 지사의 3·1운동과 김해 만세시위 /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배동석은 1899년 3월 22일 김해의 한약사 배성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9세기 말 개신교가 전파되기 시작할 때 이를 받아들였으며 친지들은 경남 중부지역 교회 설립의 주축이 됐다. 이는 이후 3·1운동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서울 남대문 순화동 일대의 한 하숙집에서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김성국, 배동석, 이굉상, 김문진 등 하숙생 4인방은 모두 세브란스 의전 학생으로 3·1운동 준비과정에서 민족대표를 도와 지방 민족대표 서명자를 확보하기 위해 밀사로서 지방을 다녀오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지방에 시위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배 지사는 민족대표 33인 이갑성의 밀명을 받아 경남 마산 지방 지도층을 만나고 운동 참여를 설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마산과 함안의 만세 시위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는 4월 2일 김해시위를 주도하고 검거돼 옥고를 치렀다. 배동석의 막내처남 김필오의 진술에 의하면, 배동석의 부인인 김복남은 서대문감옥에서 고문으로 눈알이 빠지고, 손톱, 발톱이 다 빠진 배동석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배동석은 옥고 중 병을 얻어 석방됐지만 2년 후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34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한편 김해읍내 만세시위를 살펴보면 3월 30일 최초로 시위가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3월 13일 시위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3월 30일 김해읍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는 서울 정신여학교 학생인 구명순이 최초로 발의하고 주도했다. 그는 독립운동 등으로 학교가 휴교하자 귀향했지만 김해에서는 어떠한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스스로 교회 부녀자들을 권유해 김해군청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배덕수가 보고 10여 개 동리를 다니며 주민들을 일깨워 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이 시위가 계기가 돼 4월 2일과 16일 읍내 시위로 이어졌다.
 

■배치문의 생애와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 / 권도균 광주시 동부교육지원청 기록연구사
배치문은 1890년 김해 한림면 안하리에서 태어났으며 20세에 전 가족이 전남 목포로 이주했다. 그는 1919년 목포의 3·1운동인 4·8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목포 중심가에서 체포됐다.
 
그는 복역 후 '목포청년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921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1923년 5월 상해임시정부가 주최한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보천교의 독립자금을 상해임시정부와 의열단에 전달하고 국내와 연락하는 활동을 했다.
 
또 그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그의 권유로 의열단에 입단했다. 그는 의열단원으로서 1923년 12월께 '제3차 암살파괴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귀국을 하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검거되기도 했다.
 
이후 배치문은 목포와 전남지역의 노동,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조선공산당 사건 등으로 1926년 다시 검거됐다. 또 그는 일제에 항거한 학생운동인 '광주학생독립운동사건'을 지도했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호남평론 등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언론활동을 했다. 그는 1941년 일본의 대동아전쟁에 대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니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밀정 정병칠의 밀고로 투옥하게 되며, 수감된 지 1년 2개월 만에 목포형무소에서 53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배치문은 1982년 건국포장에 추서됐다가 198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현재 김해시 삼계동 화정공원 내 배치문의 기적비가 있다.
 

■김해 진영의 3·1운동의 발생 배경과 전개과정 / 이가연 동아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김해 진영은 3월 31일 하계면 진영시장, 4월 3일 하계면 진영리, 4월 5일 하계면 진영시장에서 3차례에 걸쳐 시위가 전개됐다. 진영의 만세시위의 특징은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진영지역에 진출해 토지를 잠식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적대감과 저항의식이 시위의 원동력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3월 31일 첫 시위는 지역 청년들이 중심이 됐다. 당시 하계면 서기로 재직 중이던 김우현은 신문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같은 마을 김성도, 김정태, 김용환 등과 함께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모의했다. 이들은 3월 31일 진영시장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 수십 장과 선언서를 장꾼들에게 배부한 뒤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수많은 장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당시 판결문 시말서에 따르면 약 2000명, 헌병 보고에는 200명이 참가했다고 돼 있다.
 
4월 5일에는 하계면 한문서당의 학생으로 당시 17세였던 안기호, 김종만 등이 시위를 모의하고 태극기를 준비해 서당학생 30여 명과 하계고개 밑에서 진영시장으로 시위행진을 했으며 시장에 있던 장꾼 등 2000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장유의 만세운동과 조순남의『김승태만세운동가』의 관계적 고찰 / 이홍숙 문학박사, 창원대학교 외래교수
장유면의 만세운동은 4월 12일 김종훤과 김승태가 주축이 돼 일어났다. 김종훤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유하리에서 신문의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해 민족교육과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하고 있었고, 김승태는 정통적인 유학자로서 전통학문에 정진하는 인물이었다.
 
김종훤이 서울에 갔다가 파고다 공원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에 가담하고, 거기서 얻은 독립선언서를 옷짐 속에 숨겨서 내려와 김승태와 거사를 준비했다.
 
12일 김승태가 태극기를 들고 앞장 서서 50여 명의 무리와 함께 무계리로 향하고 이에 군중이 더해져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김종훤과 김승태는 정오에 대청천 언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이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천지에 진동하는 듯했다고 전해진다.
 
시위 과정에서 유하리의 손명조와 김용이, 관동리의 김선오 등이 적진으로 뛰어들어 헌병과 보조원의 총을 뺏으려다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순국했다. 그 가족들과 시위 주도자들이 시신을 업고 분노하며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 헌병주재소를 부숴버렸으며 사망한 김선오의 둘째 아들 김예천이 대항하다가 처참하게 구타당했다. 김승태와 김종훤을 비롯한 10여 명이 헌병대에 끌려가고 난 후 시위가 수그러들었다.
 
김승태의 어머니인 조순남 여사의 내방가사인 '김승태만세운동가'에는 만세운동의 당위성, 준비과정, 실상과 연행, 형무소 이송, 수감과 면회, 재판장 모습 등이 상세히 실려 있다. 특히 조순남 여사는 아들에게 잡혀 온 모든 사람을 대신하고 의연하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승태만세운동가'에는 만세운동의 중요성과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담고 있어 역사문화적 가치가 크며, 조순남 여사를 여성독립운동가로서 재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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