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성련 김해뉴스 독자위원·덕정초등학교 교사

'어차피 어차피 3월은 오는구나. 오고야 마는구나. 2월을 이기고 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넓은 마음이 돌아오는구나.' 어느 시인의 시처럼 3월이 오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넓은 마음의 3월을 맞이할 수 있을까?

1919년 3월 1일, 혹독한 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존을 위해 넓은 마음의 민중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어선 날, 우리는 그날과 그 일을 삼일절, 삼일운동이라고 부른다.

독립 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거리 행진을 하며 만세 시위를 한 3·1 운동은 학생, 교사, 노인, 노동자, 농민, 상인, 기생 등 범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민중운동이다. 일제의 지배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정신은 3·1운동을 지속하는 힘이 되어 탑골 공원에서 거리로 역으로 도시로 농촌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만세 시위가 멈추지 않자 일제는 헌병 경찰과 군인을 출동시켜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을 뿐인데 총에 맞고 칼에 찔리고 감금당하고 불에 타 죽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 시위는 더 늘어났고,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3월부터 5월까지 3·1운동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0여 만 명, 그 중 피살당한 사람은 7500여 명, 부상자는 1만 6000여 명, 체포된 사람은 4만 7000여 명이었다. 그곳에 열일곱 나이의 소녀가 있었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3·1 만세 운동을 하다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남긴 유언이다.

우리는 어쩌다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열여덟의 꽃다운 소녀는 왜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죽어야만 했을까? 이 모든 원인과 책임이 일본에게만 있는 것일까? 우리의 잘못은 없었는지 제대로 반성한 적이 있었던가.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인권을 유린하며 지배할 때, 그곳에는 나라의 통치권을 내어주며 일제에 협조한 친일내각의 대신들이 있었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의 혈서를 쓰고 독립 운동가들을 토벌한 조선인 장교들이 있었으며, 동포에게 총을 겨누고 잔인하게 고문했던 친일 부역자들이 있었다.

이들 친일파와 그 자손들은 광복 이후에도 부와 권력을 누리며 대한민국의 훈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자랑스럽게 누워있으며 대를 이어 대통령까지 되었다. 반면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은 친일파들을 피해서 외롭고 가난하게 살다가 공원이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항일 독립운동 기념단체들이 상훈법 개정으로 매국노와 독재자의 훈장을 박탈할 수 있도록 국회가 법을 개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반성하고 청산해야 한다. 그래야 일본의 망언과 도발에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정부와 지자체, 교육청, 기업 등 여러 기관과 단체들이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떠들썩하게 준비하고 있다.

부디 100주년의 행사가 3·1운동의 정신을 되새기고 희생한 선열들의 염원을 기리며, 부끄럽지 않는 새로운 미래 100년을 열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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