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부인이 쓴 현판이 걸려 있는 정문.

 

꽃잎 젖은 소매에 나라 잃은 설움
박목월·박두진과 깊은 우정, 청록집 발간
만년엔 이승만 독재 비판하는 '지사의 길'
6·25때 납북된 부친은 북한에서 한의학자


 

▲ 청록파 시인 조지훈.

민족의 뿌리가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을 올곧게 노래한 시인. 조지훈을 기념하는 문학관은 경북 영양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인이 태어나서 자란 주실마을에 우뚝 선 조지훈문학관. 기와지붕에 나무로 지은 건물이 조선시대 향교를 연상케 하는 문학관 정문에는 부인 김난희 여사가 붓글씨로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전시실로 들어가면 시인의 상반신 동상이 있다. 굵은 테 안경을 쓴 모습이 타고난 선비인 동상 뒤편에는 일제강점기 맏형 조동진과 함께 '소년회'를 조직해서 활동하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걸려 있다. 바로 그 소년회 때문에 일본 경찰에 끌려간 조동진이 모진 고문에 못이겨 세상을 떠났다는 사연이 이어진다. 전시실 벽면에는 시인의 대표작 '승무'가 적혀 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문학관 전시실로 들어가면 시인의 대표작 승무의 전문이 걸려 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기와지붕에 목조건물이 정갈한 문학관 안뜰.
▲ 자연미가 돋보이는 문학관 앞마당.

이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글품을 열아홉 살 때 발휘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시인이 살다간 발자취를 알려주는 연보 앞줄에는 주실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룬 한양 조 씨 가문의 내력이 소개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해 고향인 주실마을에선 단 한명도 일본식으로 성과 아름을 바꾼 사람이 없도록 이끌었다는 할아버지 조인석과 1920년대 좌우로 분열됐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엮은 신간회 총무간사를 맡았던 아버지 조헌영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행적이 적혀 있다. 
 
조지훈 역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몸을 피하던 시절, 선배 시인 박목월에게 보낸 헌시(獻詩)가 바로 '완화삼'이라고 했다.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나라를 잃은 선비의 한을, 꽃잎에 젖은 적삼을 입고 떠도는 나그네로 표현했던 노랫말이다
 
이에 대해 동료 시인 박목월이 "강나루 건너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시작되는 화답시를 발표한 것이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연이 눈길은 끈다.
 
이후 두 시인이 8·15 광복 다음해인 1946년에 동료 시인 박두진과 함께 발간한 시집이 '청록집'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불과 4년 후에 닥쳐온 6·25 전쟁은 조지훈의 집안에 엄청난 상처를 가져다주었다. 할아버지 조인석이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하지만 조 씨 가문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민족지도자로 존경받던 시인의 아버지 조헌영이 인민군에 납북되는 시련으로 이어졌다.
 

▲ 전시실 내부. 시인의 작품이 새겨진 그림이 걸려 있다.
▲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시인의 가계도.

이후 조헌영은 북한에서 전통의학의 현대화에 기여하는 한의학자로 활동하다 1988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전시실 벽면에 적혀 있다.
 
그런 아픔을 겪은 시인은 이후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글에서 벗어나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질타하면서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는 등 지사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소개말이 인상적이다.
 
이처럼 꼿꼿한 선비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조지훈 시인은 마흔여덟 살이 되던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친일모리배들과 기회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세태 앞에서 국민 애송시 낙화를 남긴 채.
 
꽃이 지기로 서니/ 바람을 탓하랴… //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김해뉴스 /영양=정순형 선임기자 junsh@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