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들이 손으로 옮겨 적은 원고지. 뒷편으론 손자를 등에 업은 작가 조정래가 보인다.

 
 

 여순사건부터 6·25 전쟁까지 소설로
 좌우 대립 현장, 벌교읍 뒷산에 우뚝

‘위대한 전사’, 소년 빨치산 모델은 박현채
 이적 표현물 시비 넘는데, 무려 11년 세월

 전시실 2층엔 ‘독자가 옮겨 적은’ 원고지
 안내데스크엔 1년 걸리는 느린 우체통






분단의 아픔을 그려낸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 1948년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원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부대로 투입되는 것에 반발한 여순사건부터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좌우 이념 대립이 빚어낸 민족사의 비극을 그려낸 소설 태백산맥을 기념하는 문학관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 야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
 
문학관 입구에 적혀있는 작가의 어록. 사람이 우선이라는 뜻일까.
 
1층 전시실로 들어가면 1983년에 연재를 시작해서 6년 만에 단행본으로 탄생한 소설 태백산맥에 숨겨진 뒷이야기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 소설 태백산맥을 제본한 조형물. 왼쪽엔 작가가 현장을 답사할 때 사용했던 소품들이 놓여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70년대 베스트셀러 '민족 경제론'을 집필했던 진보경제학자 박현채 교수가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소년 빨치산' 조원제의 실제 모델이라고 밝힌 대목. 6·25전쟁 때 광주서중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소년 박현채가 소년돌격대 문화부장으로 '위대한 전사'라는 칭호를 받았던 소설 속 조원제라는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재벌 독점자본 중심의 고도성장 정책에 준엄한 비판을 가하면서 진보적 경제학도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던 박현채 교수가 빨치산이었다니….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전시실 벽면에는 1986년 겨울, 눈 덮인 지리산 임걸령에서 작가와 박 교수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소설 태백산맥을 집필할 당시 빨치산 투쟁이 치열했던 현장을 박 교수가 일일이 동행하면서 생생한 증언을 보탰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사진 아래편 유리 전시관에는 박 교수가 친필로 쓴 인민군 군가 '스탈린의 노래'의 가사가 적힌 원고지가 펼쳐져 있다.
 
"산마루를 따라/ 자유로운 솔개 날아다니는 곳/ 영명하고 친애하는 우리의 스탈린에게/ 인있는 아름다움 보내네…."
 
스탈린의 노래 옆에는 박 교수가 구술한 인민 군가 수십 곡의 가사를 받아 적은 원고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박 교수는 기억력의 천재였다"는 작가의 회고담과 함께. 

▲ 좌파 정하섭과 무당 소화가 사랑을 나누었던 촌집.

이처럼 민감하기 짝이 없던 좌우 이념 문제를 좌파 진영에 가담한 인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태백산맥의 앞길이 마냥 평탄할 수는 없었다. 공안정국이 몰아치던 199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인수 씨와 일부 우익단체 회원들이 "소설 태백산맥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면서 작가 조정래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한 것이다. 
 
이후 11년 동안 진행된 검찰과 경찰의 수사 과정을 거쳐서 소설 태백산맥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으면서 국가보안법의 족쇄에서 풀려날 때 검찰 당국이 발표했던 멘트가 재밌다.  
 
"만약 소설 태백산맥이 이적 표현물이라면, 우리나라에 무려 600만 명에 달하는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범법자가 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이지만 소설 태백산맥이 '분단의 허리'를 넘는데 무려 11년이란 걸린 셈이다.
 
전시실 2층으로 올라가면 작가의 아들과 며느리를 포함한 독자 100여 명이 소설 태백산맥을 직접 손으로 옮겨 적는 원고지들이 쌓여 있다. 원고지 1만 6641장. 남자 어른의 허리춤에 와 닿을 만큼 높이 쌓인 원고지. 하루 6시간씩 573일에 걸쳐 옮겨 적었다는 어느 독자의 후일담이 눈길을 끈다. 분단을 아픔을 소설 속에서나마 극복하려는 독자들의 염원이 이토록 강렬했던 것일까.

▲ 멀리서 바라본 태백산맥 문학관.

 
발걸음을 돌려 1층 전시실 앞으로 내려오면, 입구 안내 데스크로 나오면 '느린 우체통'이 있다. 가까운 사람에게 애틋한 사연을 담은 엽서를 보내면 1년 뒤에 전달해주는 코너라고 했다. 내친김에 안주머니에서 꺼낸 볼펜으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친지에게 적어 보낸 소감문. "비록 평범한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는 보통 시민에 불과하지만, 가끔 민족사의 아픔을 되새기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적는다."

김해뉴스 /보성=정순형 선임기자 junsh@


*찾아가는 길
전남 보성군 벌교읍 홍암로 89~19.
△ 남해고속도로(152㎞)를 타고 가다 순천만 IC를 거쳐서 벌교 방향으로 가는 녹색로(15㎞)를 이용하면 태백산맥문학관에 도착한다. 약 2시간 20분 소요.

*관람 시간
① 오전 9시~오후 6시.
② 매주 월요일과 설날과 추석 당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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