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었던 이갑성(1889~1981) 애국지사가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기 전이었다. 면회가 금지될 정도로 위중했다. 이 지사에게 간호사가 쪽지를 한 장 건넸다. 그 쪽지를 읽은 이 지사는 반가움에 몸을 일으켰다.
"배동석이 왔다고?" 쪽지를 건넨 이는 배동석이 아니라,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배동석의 처남 김정오 씨였다. 일제의 핍박에 분연히 일어서 조국을 위해 온몸을 던졌던 시절을 함께 했던 동지 배동석의 이름만 듣고도 감격한 이 지사는, 그때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배동석의 업적을 증명했다.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가족들이 내세우지 않은 탓에 역사의 뒤로 잊혀져 가던 배동석 애국지사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배동석(1891~1924)은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 애국지사이다.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99에 안장된 애국지사 배동석의 묘 사진제공=김해교회 역사위원회

200여 년 전 충청도 충주 관찰사를 지낸 배수우의 아들 배광국은 김해에 정착하여 약방을 운영했다. 부친에 이어 약방을 계속 운영하던 배성두(1840~1922)장로는 1894년 김해교회를 설립하고 1907년 김해합성초등학교를 설립했다(정식 개교는 1909년). 김해에서 100년이 넘어선 전통을 가진 교회와 학교가 배 씨 집안에 의해 초석을 놓은 것이다. 김해교회는 한국인 스스로 세운 가장 오래된 교회(평양의 소래교회를 제외하고)로 교인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김해합성초등학교에서는 지역과 나라를 위한 인재와 애국열사가 배출되어 근대화에 기여했다.
 
▲ 배동석 애국지사 근영.
한국인 건립 최초 교회 김해교회 배성두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나 만주·상하이에서 김좌진과 활동

1918년 귀국해 세브란스의전 재학
삼일운동 등 만세시위 이끌다 검거
1980년 독립운동 인정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2004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배동석은 배성두 장로와 부인 이한나 씨의 장남으로 1891년 태어났다.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24년 세상을 떠났다. 33세였다. 1980년 8월 15일 독립운동의 노고가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04년 독립유공자로 추대받아 그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99에 안장되었다.
 
7월 말, 김해교회 역사위원회 고준석 위원장(김해교회 장로)과 김영기 총무(집사)와 위원들은 현충원의 배동석 애국지사 묘를 참배했다. 일본의 자민당 의원들이 독도를 방문하겠다고 방한하겠다는 망언을 하던 그 때, 역사위원회는 배 지사의 묘에 헌화를 했다.
 
1994년 '김해교회 100년사'를 발간하면서 배동석 지사의 업적을 알게 된 위원회는 지금까지 관련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있다. 독립운동 관련 문건에 기록된 흔적을 하나하나 찾아 분류하고 모으고 있던 중, 미국에 살고 있는 손자 배기호(69·장로·약국운영) 씨를 만났다. 선조들의 이야기를 쓴 소설 '약방집 예배당'의 출판기념회 차 2007년 5월 한국에 들린 배기호 씨가 김해교회를 방문한 것이다. 역사위원회는 위원회대로, 유족은 유족대로 자료를 모으고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가 만난 이후 서로 가지고 있던 자료가 한데 모아졌다.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았던 기록을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토지대장에 기록된 집주소도 찾았다. 동상동 981-1. 김해 사람들에게 추억의 장소인 음식점 '경화춘' 자리가 배동석 가족의 집이 있던 곳이다. 분성산 자락의 배 지사 가묘 자리와 기념석도 확인했다. 독립운동 기록, 전국의 100년 이상 된 교회, 지역문화원, 유관 단체, 개인에게서 관련 제보가 이어졌다. 김해와 김해교회에서 미처 몰랐던 배동석의 흔적들도 속속 발견되었다. 자료를 모으고, 역추적해서 새로운 자료를 찾고, 분류하고, 검토하는 과정은 지금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배 지사는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 중 배일 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목포에서 교직생활 중 다시 배일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 후 만주와 상하이로 가서 김좌진과 함께 활동했다. 1918년 귀국한 그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대)를 다니던 중에 학생대표로 3·1운동에 참가했다. 세브란스 의전 구내에서 음악회를 빙자해 김원벽, 김형기 등 동료학생들과 독립운동을 논의하는 등 학생층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다. 민족대표 이갑성의 지시로 경남지역 인사들을 독립운동에 참여시키고, 김해와 처가가 있던 함안을 비롯한 경남지역에 만세운동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도 담당했다.
 
▲ 1950년 문여봉 김해읍장이 배동석 지사에게 '삼일운동기념장'을 수여했다.
김해문화원 홈페이지 '김해의 역사' 편에도 3월 30일 밤 김해읍내에서 시작된 만세시위가 31일과 4월 5일에 하계면(진영시장), 4월 11일에 명지면(명호시장)을 휩쓸었고, 4월 12일에 장유면 무계리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4월 16일에 칠산 이동리의 시위로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해읍 출신 배동석은 세브란스의전 학생으로 2월 26일 마산에 내려와 박순천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고,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삼일운동의 학생대표로 활약한 뒤, 선언문을 가지고 김해로 내려와 임학찬·배덕수 등과 은밀히 의논하여, 3월 30일 밤 10시 읍내 중앙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김해 최초의 만세시위였으나 미리 부산에서 파견되어 있던 5명의 일본군에게 배동석·임학찬·배덕수·박덕수 등이 검거되었다'는 기록은 배 지사 외에도 많은 김해 사람들의 의기가 함께 했음을 증명해 준다.
 
독립지사들에 대한 일제의 핍박은 가혹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7집'에서 이정은 책임연구원은 '배동석은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중병을 얻었다. 그는 병보석으로 나와 치료 중 1924년 8월 29일 사망하였다. 그의 부인 김복남은 서대문감옥에서 고문으로 눈알이 빠지고, 손톱 발톱이 다 빠져서 나온 남편 배동석을 보고 정신병을 앓게되어 다시 친정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 지사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것은 세브란스 의전의 교수와 학생들, 교인들의 탄원서 덕분이었다. 풀려날 당시 결핵을 심하게 앓고 있었는데, 배 지사를 위해 세브란스에서는 국내 최초로 결핵병동을 설립했다. 배 지사는 이 병동의 최초 환자였다. 2008년 연세대학교는 배 지사에게 명예졸업증서를 수여했다.
 
"입수된 자료를 검토하고 서로 연결시켜 가다 보면 귀한 역사 퍼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알면 알수록 감동을 받게 되고, 놀라게 된다.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관했던 것은 신앙의 힘과 개인의 의지가 강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김영기 씨의 말이다.
 
"조사를 하면서 중요한 우리 역사를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정리해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가득하다"라며 고준석 씨는 김해교회를 중심으로 배동석 애국지사를 널리 알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생가가 있던 자리에 표지석을 세우는 일, 3·1만세운동을 김해의 청소년들과 함께 재현하는 일 등 할 일이 많다고 말한다. 2014년 교회 설립 120년사를 발간할 때는 누락된 배 지사의 행적을 추가 보완할 예정이다.
 
손신애(45·삼계동) 씨는 "배동석 애국지사가 김해교회의 교인이라는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몇 차례 옥고를 치르고 그렇게 참혹한 고문을 받은 줄은 미처 몰랐다. 교인으로서, 김해시민으로서, 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가슴이 뜨거워진다"며 우리 근대사의 소중한 한 역사를 알게 되었다고 감회를 털어놓았다.
 
올해로 우리는 광복 66주년을 맞는다. <김해뉴스>는 배동석 애국지사를 비롯해, 조국의 운명에 자신을 바친 김해의 애국선열들을 잊지 말자는 마음에서 이 지면을 마련했다. 조국을 위해 굳은 신념과 의지를 태우다 세상을 떠난 배동석 애국지사. 그는 우리 곁에서 영원히 서른 셋, 푸르고 아름다운 나이로 살고 있다. 


[Tip] 소설 '약방집 예배당'

한국인 건립 최초 교회, 김해교회와 배씨 일가족사

한국 교회의 개척과 독립운동으로 순국한 배 씨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소설(홍성사 펴냄). 18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200여 년의 시간을 배경으로, 배 씨 일가의 흥망성쇠를 담았다.
 
조선시대에 신유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김해로 도피한 충주 관찰사 배수우, 한국 교회 초기에 신앙의 박해를 헤치고 학교와 교회를 세운 배성두, 일제강점기에 3·1운동의 주동자로 투쟁하다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한 배동석 등 배 씨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책은 배 씨 일가의 가족사를 통해 한국 초대 교회의 성장과 박해의 과정을 따라가며, 일제강점기에 신앙의 힘으로 벌어진 독립운동을 증언하고 있다. 아울러 미국 이민사의 출발을 보여준다.
 
2007년 제24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신앙일반 국내부문 수상작이다. 영문판으로 출간되어 미국에서 판매 중이며, 중국에서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저자 박경숙은 1992년 미국에 이민을 가, 1994년 미주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이다.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이자 세계한민족작가연합 이사로 활발히 활동하며, 미주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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